좋아서 하는 것

크루셜스타 정규 3집 - [Serenity, Courage, Wisdom] 리뷰.

행쿠 2022. 4. 1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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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CiAL STAR의 "Maze Garden"은 그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앨범입니다. 대중적인 힙합의 대명사였던 그가 거의 처음으로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드러낸 앨범이었고, 앨범 볼륨은 물론 곡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까지, 많은 분들이 CRUCiAL STAR를 다시 본 계기가 됐을 겁니다. 아티스트 본인도 앨범 전후로 여러 이벤트와 코멘트를 남겼고,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하는 현실을 슬퍼하는 벙개송을 발표하기도 했죠.

 
근데 의외로(?) 전 "Maze Garden"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할 구석이 많은 앨범인 건 알지만 주관적으로 마음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로 표현의 깊이 문제였습니다. 진솔함이 묻어나는 건 좋았지만 표현들이 진부하게 느껴졌고, 도출되는 결론도 특별할 것이 없었습니다. '트레비 분수' '펜의 편지' 등 독특한 소재에서 출발해도, 포장만 그럴듯할 뿐 결국 실패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다짐을 얘기하는 면에서는 다른 래퍼와 다를 바 없어보였거든요. 둘째는, 싱잉 랩을 잘 하는 래퍼인데도 싱잉의 활용도가 낮았고, 랩은 랩대로 단순해서 기대했던 듣는 즐거움도 못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후 CRUCiAL STAR는 여러 EP를 발표하고 Starry Night Music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평소의 듣기 편한 음악으로 잠시 돌아간 듯 보였습니다 (마냥 사랑 노래만 한 건 아니지만). 바쁜 2020년을 보낸 후 오랜만에 발표한 새 정규 "Serenity, Courage, Wisdom"은 다시 "Maze Garden"의 명맥을 이어가는 앨범으로, 여러모로 견고하고 성숙해진 음악을 들려줍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청각적인 즐거움의 확대입니다. CRUCiAL STAR는 단순히 싱잉 랩 잘하는 것을 넘어 노래를 잘 하고 잘 만드는 뮤지션입니다. 음악적인 센스와 중후한 톤의 맛을 잘 살린 노래를 곁들일 때 그의 음악은 독보적인 레벨에 들어섭니다. 이번 앨범은 싱잉의 활용도가 무척 높아져 힙합이 아닌 노래로써도 듣기 좋아졌습니다. 특히 "No Coward Soul is Mine"처럼 랩에서 자연스럽게 싱잉으로 전환시키는 스타일은 장기가 잘 드러난 부분입니다 (사실 마찬가지 이유로 "Maze Garden"에서 "Just A Song"만은 좋아했습니다). 다만 "humming"의 가성 같은 건 좀 무리수 같긴 하군요.
비단 싱잉 뿐만 아니라 랩도 확연히 다릅니다. 상당히 스킬풀한 랩이 자주 등장하는데, 저음의 목소리인만큼 강하게 몰아칠 때 무게가 있습니다. 이는 전작에 이어 이번 앨범에도 담긴 진지함과 비장함과도 어울립니다 -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랩은 단순히 스킬적인 면 뿐만 아니라 좀 더 몰입이 쉬운 연기의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비트와 믹싱 등 사운드도 그의 퍼포먼스를 튼튼하게 떠받쳐주고 있죠 - 이 맥락에서 전작에 비해 CRUCiAL STAR의 프로듀싱이 늘어난 부분은 특기할만 합니다.
 
아직 가사에 대한 불만은 완전히 있습니다. 좀 더 듣는 부분이 강조되었고, 라임의 비중과 기술이 늘었기에 거의 무시할 수 있을 수준으로 줄었지만 왠지 뻔하고 호기심을 유발하지 못하는 (뭐랄까, 한국형 신파 영화 보는 그 느낌..) 가사 표현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 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너무 긍정과 부정 중 한쪽에 치우쳐 평면적으로 전개되는 게 아쉽습니다. "안개"에서는 무척이나 우울해하며 비관으로 일관하더니, "Shanti"에서는 갑자기 서른셋에도 섹시함을 유지하는 자기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된달까? 혹은 "Berlin" 2절처럼 화자의 입장을 바꾸는 것 - 제가 전작에서 특히 꺼려했던 이야기 방식입니다. 하는 얘기의 폭이 예상 가능한 선이었으니까요.
 
"Maze Garden"에서 처음 보인 CRUCiAL STAR 고뇌는 본작에서도 이어지지만, 대부분을 결심으로 승화시킨 듯합니다. 그 결심은 긍정적인 전망과 자신감, 결의에 찬 강렬한 랩 플로우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비장감이 마지막 "Shanti"에서 비교적 편안한 비트로 해소되며 마무리 짓는 것은 얼추 그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이 모양을 잡아가고 있다는 뜻이겠죠. 처음에 말했듯, 견고하고 성숙해진 그의 모습을 언어로나 소리로나 접할 수 있던 앨범이었습니다. 아직 느껴지는 허전함은 이미 사소한 크기거나 곧 메꿔질 거라 기대해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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