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단 한줄기는 크루의 이름 'Vitality' 뿐인 아티스트.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모든 활력을 전소시켜 버릴듯한 이그니토의 첫 점화식은 이제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악마성향의 하드코어 힙합을 눈도장찍는 데 성공했다. 정규 1집 Demolish는 2집이 나오기 10년 전에 발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이그니토의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것 만으로 이 래퍼의 가치는 증명이 되었으리라. 절규하듯 웅크린 채 서있는 동상 세개가 서있는 굳게 닫힌 성문을 감싼 암과 적의 기운은 이그니토의 점화식을 한층 더 뜨겁게 했다.
아쉬운 점은 이센스가 피처링한 'Lost chronicle'로서만 재발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 나름의 킬링파트적 요소가 많은 앨범이라 개인적으로 해석하기 때문. 또한 브라스나 파이프오르간 등 고풍스러운 음향을 사용할 뿐 아니라, 'Carnival'같은 상대적으로 단조가 적고 신서사이저를 적극 활용한 듯한 멜로디를 쓰며 앨범의 컨셉을 잃지 않는 중심이 잘 선 앨범이다. 유일하게 들어있는 Interlude인 'Departure'의 성문이 열린 직후 진격하는 전군의 시선에서 쓴 'Extermination'의 불쾌하고도 날 선 멜로디는 이그니토의 절망적 세계관을 그 어떤 곡보다 잘 서사한다. 앨범의 중반부를 바라보는 이 타임라인에서, 장르팬들은 지금의 '기믹'과도 같은 컨셉에 먹히지 않고도 묵직한 비트와 강인한 플로우, 다듬어진 어휘로 어둠을 읊는 이그니토에게 영혼을 팔기 시작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SURp4NXrjfA&feature=youtu.be
필자가 생각하는 이 앨범의 킬링트랙 'Guillotine'.
인트로에 감아 올려지던 서슬 퍼런 칼날같은 이그니토의 보이스와 낮게 깔린 곱추의 외침같은 배니쉿뱅의 피처링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펼쳐지는 아포칼립스적 세계관의 이그니토는 때로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본 '비관론'에, 때로는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자들을 처단해버리는 Rap 'Guillotine'에 대입하며 인간 내면의 군상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철학과 출신인 그의 중압감 있는 어휘는 이 신랄한 비판들과 잔혹한 사실들을 묘사하는 데 투박한 양념으로 작용하며 더 처절한 그림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말로를 'Carnival'이라는 트랙으로 분출하며, 진실을 외치는 분노의 목소리를 한층 더 드높인다. 'Demolish'라는 단어의 뜻처럼 이그니토 내면의 악폐습을 몰아내고 다시금 새로운 터전을 짓는다는 서사의 마침표를 찍는 스토리이지 않을까. 그렇게 마무리 된 그의 땅 위에는 Vitality를 통한 재건과 계속된 흥망을 반복하는 절차가 반복된다. 종래에는 악마의 환상곡 'Rhapsody of the devil'을 노래하며, 'Dreamin'에서 미약하게나마 꿈꾼 이상향의 반대편과 결국 타협하는 세계관으로의 진행을 치부한다.
겉으로 볼 때 단단하기만 한 주철같은 앨범인줄 알았던 Demolish의 내부에는 이그니토의 철학적 메세지가 있는게 아닐까. 단단하기만 할 뿐 잘 깨어질 줄 알았던, 단면적인 가치뿐으로 종종 해석되던 이 앨범은 사실상 악마를 자처하는 이 래퍼의 이면적 가치로서 위상이 드높여졌던 것이 아닐까. 그 사이, 느린 BPM과 운율 그리고 흔치 않은 악기들의 사용으로 한국 힙합씬의 스페셜리티로 불릴 수 있는 그의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그의 첫 점화식, 'Demolish'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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