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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머가 말하는 "에픽하이(Epik High)"

행쿠 2022. 2. 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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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에픽하이의 팬이다(글에 앞서 팬심, 빠심 가득한 이 글이 싫다면 정중히 뒤로가기를 권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열렬한 팬이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한다. 여전히 내 플레이리스트엔 에픽하이 냄새 가득한 음원들만 가득차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에픽하이 음악이 다 담긴 건 아니다. 대중적인 취향에 가깝긴 해도 에픽하이 다움을 사랑해서 에픽하이스러운 음악들이 가득할 뿐이다. 그래서 에픽하이답지 않은 음악엔 때론 아니다라고 얘기할 줄 아는 팬이라 스스로 자칭하고 싶다.

 

평단의 평가는 아티스트에게 늘 양날의 검이다. 평단의 호평에 잣대를 두면, 음악은 교과서가 된다. 흡사 "내 음악은 음학이 아닌 철학이 담긴 묘약"이라고 비유하던 MC 스나이퍼의 가사처럼 아티스트의 철학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면 매혹적인 멜로디가 된다.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시선에 맞추다보면 아마 아티스트의 멜로디는 교과서에 실려야 맞을 것이다. 때론 아티스트의 한 획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다. 일례로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나 "난 알아요" 같이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면 그건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티스트의 작업물은 철학의 영역이자 주관의 영역으로 존중해야 한다. 교과서보듯, 밀폐용기 안에 잘린 무처럼 가지런히 배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힙합 씬의 MC 중 가장 많은 평단의 질타와 호평을 받은 이들을 꼽으라면 난 단연 에픽하이(EPIK HIGH)를 꼽고 싶다. 1집부터 3집에 이르기까지 언더 씬부터 오버 그라운드에 오르는 매 순간 순간이 그들에게는 비평가들의 극찬이었고, 상업적인 성공마저도 박수갈채를 받던 이들이 에픽하이였다. 하지만 4집부터 쏟아지는 불평과 불만, 지나친 상업성과 서정성의 굴레는 에픽하이에겐 숱한 해체의 갈래길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 이유기도 하다.

 

이에 반해 팬들의 생각은 또렷하다. 이만하면 "에픽하이답다"는 공통된 생각을 품는다. 숱한 시도 속에 자신의 스타일을 버무릴 줄 아는 아티스트는 씬에서도 손에 꼽는다. 자신의 줏대를 세우고 지킬 줄 아는 능력을 두고 소신이라 한다면, 에픽하이는 여러 의미로 소신이 강한 힙합 그룹인 셈이다. 팬들의 시선과 달리 냉혹한 평단의 시선은 이제 쓰리다 못해 격노에 가깝다. 농담 삼아 길가다가 미쓰라한테 한 대 얻어 맞지 않는 이상, 혹은 우연히 투컷이 뱉은 침이 신발에 묻지 않은 이상 이렇게 에픽하이에게 유독 냉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주로 에픽하이에게 냉정하다 못해 냉담한 필진이 주를 이루는 리드머의 에픽하이 리뷰를 통해 평론가들이 바라보는 에픽하이는 대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에픽하이 = 서정적 고집의 산물

 

과거 리드머는 소품집 [Epilogue]의 평을 통해 에픽하이의 음악을 두고 '재기발랄함을 차분하게, 그리고 성숙하게 가라앉혔다'는 표현을 했다. 4년 뒤 발매한 [신발장]의 인트로 트랙에서도 서정적 멜로디를 먼저 꼽을 만큼 에픽하이는 서정적인 힙합을 하는 MC라는 이미지가 그들에게 각인된 듯 하다. [WDSN]의 타이틀곡 "연애소설"에서도 서정성이 강조되고, 인트로 트랙인 "난 사람이 제일 무서워"에서도 서정이라는 단어는 마치 벽에 단단히 박힌 못과 같은 이미지를 덧씌운다.

 

여기서 의문이 더해진다. 대체 힙합의 영역에 서정이 자리해선 안되는 건가? 한 때, K-신파라는 용어가 한국 영화 판을 주름잡았다. "국제시장", "7번방의 선물"과 같이 분위기가 고조될 수록 감동적 서사로 몰고 가면서 눈물, 콧물 쏙 빼는 결말로 흥행몰이를 하는 뻔한 스토리텔링을 꼬집은 표현이다. 흔해 빠진 클리셰로 자리 잡았을 때야 하나의 통칭이 붙으며 비판의 여지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씬에서 소위 사랑놀음과 잔잔한 멜로디에 강조되는 가족애와 동료애를 주된 핀트로 잡는 아티스트는 몇이나 될까? 오직 에픽하이만이 할 수 있는 얘기들도 아니지만, 에픽하이여서 가능한 얘기인 건 부정할 수 없다. 흔히 성공공식이라 여겨지는 대중성과 에픽하이만의 스토리텔링은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서사적 풀이이며, 그걸 부정한다면 에픽하이의 존재 이유도 희미해질 뿐이다.

 

리드머의 시선을 바라보면 에픽하이 다운 걸 깨부수길 바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에픽하이 답지 않은 냄새를 풍겼던 싱글 앨범 "Face ID"나, 정규 10집 첫 번째 파트였던 [Epik High is Here 上]의 평가가 냉혹한 걸 보면 대체 이들이 에픽하이에게 바라는 힙합의 스타일이 뭔지 불분명하다. 얼터너티브도 이상하다, 락적인 면모도 하다 만것 같다, 붐뱁은 지루하다... 서정은 뻔하다... 미쓰라가 2집 "뒷담화"에서 이런 멘트를 한다. "당신들 발에 맞게 다 못 만들어 줘"

 

2. 감흥없는 라임... 라임은 라임이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흔히 조선 힙합의 본연이라 농담삼아 떠올리는 하여가의 한 구절을 읽다보면 수백년이 흘러도 각운의 묘미를 맛있게 느낄 수 있다. 비슷한 뜻과 발음으로 언어유희를 뽐내는 본토 힙합과 달리, 우리나라 힙합의 역사에서 언어유희는 각운 짜맞추기에서 출발했다. 에픽하이의 라이밍 역시 1집에서 각운 짜맞추기로 출발해 다양한 갈래로 퍼져나간다. 하지만 에픽하이의 가사에서 라임보다 눈에 띄는 건 펀치라인이라 할 수 있다. 리듬감 아래 가사를 한 번 더 곱씹게 만드는 의미부여는 에픽하이 이름 넉자를 리스너들의 뇌리에 각인시킨 이유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에픽하이에게 라임은 펀치라인이라는 절정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변모해왔다. 가령  4집의 "백야", 5집의 "Eight By Eight", 6집의 "Supreme 100" 처럼 라임으로 떡칠 해놓은 가사집에는 저절로 밑줄이 그일만큼 펀치라인 역시 도배되어 있다. 라임 만의 묘미를 찾기엔 영어만큼 말의 재미가 다양하지 않다는 한국어의 한계를 펀치라인으로 최대한 극복하고 있는 셈이다. 라임의 묘미를 탐색하기 위해 죽어라 라임만 판다면 에픽하이의 라임은 꽤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라임은 라임이지, 흥취와 흥미는 아티스트의 색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게 아티스트의 특색이자 강점이다. 에픽하이는 펀치라인 중심의 리릭시스트적 면모를 강점으로 가진 아티스트지, 라임은 펀치라인에 다다르기 위한 계단이지, 에픽하이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건 리릭시스트라는 단어를 반쪽만 이해하고 있는 태도로 보일 뿐이다.

 

펀치라인은 말 그대로 한 방 맞은 듯한 감흥을 주는 한 줄을 의미한다. 펀치라인의 운율을 강조하기 위해선 아무 뜻없이 흐르는 일상적 흐름이 묵직하게 꽂힐 때 더 효과가 큰 법이다. [Epik High is Here 上]의 리드머 평을 보면 "WDSN 이후 라임을 흘려보내는 식으로 바뀌었다", "독이 됐다", "라임을 빼곡하게 채워 리듬감을 살리려 했다"... 정작 10집 첫 번째 파트에서 소위 '건졌다 싶은' 여러 곡들의 공통점은 라임 이상으로 강조된 펀치라인이었다. 본질을 헤친게 아니라면 이제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볼 때가 됐다. 멀리 보기 위해 눈두덩이에 두 손을 얹어도 보고 싶은 나무가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숲을 찾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3. 네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1999년 발매된 신해철 4집의 수록곡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는 당대 사회에 던진 파격적인 질문이었다. 사회의 정형성을 타파하려는 파괴적인 시도라는 평가와 더불어, X세대의 바람을 대변하는 신해철스러운 혁신가적 면모를 담아낸 곡이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노래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라는 구호가 귀에 맴돌며, 스스로에게 자문자답까지 하게 하는 철학적 효과까지 자리했다.

 

이 노래의 가사를 곱씹다보면 "목표" 라는 한 가지 개념이 떠오르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해야 하는 것, 내가 해선 안될 것 등등 여러 목표들이 번잡스레 나열되다가 궁극적으로는 '내가 할 것'이라는 방향성이 설정된다. 에픽하이에 대한 리드머의 평론을 떠나 리드머의 잣대가 취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이 방향성이다. 어떤 아티스트에게는 하고 싶은 것을 충실히 실현했다는 이유로 박수갈채를 보내는 반면, 다른 아티스트들에게는 가장 잘하는 것만 해서는 긍정적 반응을 얻을 수 없다며 지탄을 서슴없이 던진다.

 

아티스트들에게 "내가 할 것"은 영역의 경계가 없다. 팬들의 선망과 취향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을 설정할 자유도 있고, 아티스트의 색채를 드러내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도 있다. 때론 도덕과 윤리의 관점에 따라 사회상규를 어기지 않기 위해 "해선 안될 것" 역시 존재한다. 그걸 지키냐 마냐 역시 아티스트들의 자유다. 이를 평가하는 건 오롯이 팬들의 몫이며, 평론가의 몫은 결코 아니다. 재단사가 정형화된 옷을 만들면 기성복이 되지만, 창의적인 옷을 만들면 작품이 된다. 

 

틀에 갇힌 사고로 아티스트를 계속 바라보면, 평론가들의 시선은 결국 '기성복 만드는 양복쟁이'를 바란다는 의미 밖에 되지 않는다. 창의적인 아티스트에 감탄하고, 창조적인 멜로디에 경탄하던 평단 밖의 시선이 왜 평단만 오면 날이 서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숱한 도전의 역사를 거쳐온 에픽하이에게 새로운 시도가 없다며 손가락질 하고, 가장 잘 하는 것을 내놓은 에픽하이에게 뻔한 것을 내놓는다며 밥상을 걷어찬다면 대체 그들의 일관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신뢰성은 어떻게 부여할 수 있을까?

 

4. 마치며

 

에픽하이라는 힙합 그룹의 탄생이 올해로 20년이 넘었다. 20년 동안 숱한 해체 위기를 겪고도, 이 힙합그룹은 제 살을 깎듯 자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어쩌면 힙합이라는 장르 안에서 끊임없이 탈피하고 도전하려는 시도가 곧 에픽하이의 색깔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전한 도전 의식 아래 20년의 시간이 흘러 '에픽하이'라는 하나의 틀을 구성했다면, 다음 과정은 '에픽하이' 라는 이름의 클래식을 그려나가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몇 번의 앨범이 선보인 단조롭고 정형화된 패턴은 늘 새로움을 들고 나타나던 데뷔 초 그들의 모습에 익숙한 팬들에겐 엄격한 눈높이를 충족하지 못할 부분일 수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앨범은 곧 20년을 이끌어온 묵직한 힘이 빚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찬사를 보낼 만 하다.

 

20년의 무게가 곧 엄격한 잣대를 당연하게 만들어주진 않는다. 뻔한 멜로디와 뻔한 가삿말로 돈이나 벌기 위해 앨범을 낸다면 아마 이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형성과 감성에 대단한 잘못은 있지 않다. 그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좋아해줄 수 있는 음악을 하겠다는 아티스트로서의 의지가 20년째 변하지 않을 뿐이다. 이 방향성은 그 어떤 아티스트들도 틀리다 생각하지 않는다. 이 방향성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평단에게 묻고 싶다. 20년을 꾸준히 설득해온 그들과, 20년을 한 줌 글로 설득하는 당신들 중 누가 더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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